Saturday, May 29, 2010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나는 즉시 깨달았지요. "다양한 미래들(모든 미래들이 아닌)"이라는 이 구절은 내게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갈라짐을 연상하게 만들었지요. 나는 그 작품을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나의 생각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허구적 작품 속에서 독자는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를 버리게 됩니다. 취팽의 소설 속에서 독자는 모든 것을 -동시에-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들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들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증식하게 됩니다. ...
확실한 것은 그가 단 한 차례도 "시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했는지에 대한 해명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취팽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우주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된 이미지는 아닙니다. 당신의 조상은 뉴턴이나 쇼펜하우어와 달리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에 대해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의 무한한 연속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어지럽게 증식되는, 분산되고 수렴되고 평형을 이루는 시간들의 그물을 믿으셨던 거지요. 서로 접근하기도 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단절되기도 하고, 또는 수백 년 동안 서로 알지 못하기도 하는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되지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픽션들] 중.
 
 

Tuesday, May 25, 2010

이미지-세계


 플라톤에서 포이에르바하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옹호하는 모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지를 단순한 외양으로 여긴다(묘사된 대상과 이미지는 완전히 별개라고 가정한다)는 것은 묘사된 대상이 놓여져 있는 현실에 들어가려고 이미지를 만들었던 저 신성한 시대와 장소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주는 탈신성화 과정의 일부이다. 세속주의가 완벽한 승리를 거둬 회화도 점점 세속의 길을 걷게 되었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지가 원시 사회에서 지녔던 것과 같은 지위를(세속적인 용어로) 되살려냈다는 것, 바로 여기에 사진의 기발함이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꼭 마술 같다고 여기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사진이 이런 기발함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토대일 것이다. 이젤 위에서 그려지는 회화가 그 피사체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회화는 그저 피사체를 재현하거나 가리킬 뿐이다. 그렇지만 사진은 피사체와 닮았을 뿐만 아니라 피사체에 대한 일종의 봉헌물이다. 사진은 피사체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그 연장이며, 피사체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잠재적 수단이기도 하다. 사진은 다양한 형태의 소유이다. 우리는 사진이라는 대용품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하는데, 이런 소유 방식 덕택에 사진은 독특한 오브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우리가 일부 경험했든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든 어떤 사건을 소비하기도 한다. 이런 소비에 길들여진 탓에 우리는 경험(직접 겪었는지 전혀 못 겪어본 경험인지)을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 이미지와 현실의 개념은 상호보완적이다. 현실의 개념이 변하면 이미지의 개념도 변하고, 반대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진정으로 현대적인 원시주의는 이미지를 실제 사물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진 이미지는 결코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현실은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서 보게 되는 이미지와 점점 더 닮아가고 있다. 흔히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은 폭력적인 사건-항공기 충돌, 총기 난사, 테러리스트들의 폭파 등에 대해 "마치 한편의 영화같았다"라고 즐겨 말한다. 다른 식으로는 충분히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이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 설명해 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산업화가 안 된 나라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대부분 사진에 찍힐 때 불안해한다. 이들은 사진 촬영이란 일종의 침해이자 불경한 행동이며, 자신들의 개성이나 문화를 고상한 척 약탈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달리, 산업화된 나라의 사람들은 스스로 사진에 찍히고 싶어한다. 자신이 곧 이미지이고, 자신이라는 존재는 사진을 통해서만 현실적이 된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수전 손택,
이미지-세계,
[사진에 관하여] 중.

 
 

Monday, May 24, 2010

구성주의 선언


"우리는 몽상에 빠진 예술가가 아니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머그 컵, 바닥 청소용 솔, 신발, 카탈로그."


알렉산더 로드첸코, 바바라 스테파노바, 알렉세이 간,
[우리는 누구인가 - 구성주의 선언] 중.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

최근에 크리톤이라는 걱정 많은 제자 하나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죽음에 제대로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모든 사람들이 다 바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지....
다만, 명심할 것이 있네. 우리 주위에 있는 50억의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는 확신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심하고 사려 깊은 노력의 결과라는 것일세. 귀고리 코걸이 달고 찢어진 청바지 입고 껄렁대는 날라리들은 꿈도 못 꿀 일이지. 재능도 있어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하는 거야. 모든 걸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면 안되네.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야 해. 시간에 딱 맞추어 담담하게 죽을수 있게 말일세. 하지만 죽기 전날까지는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존재,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해야 하네. 그러다가 적절한 순간에 -미리 하면 안되고- 그 사람 역시 바보임을 깨닫는것이 바로 지혜일세. 그래야만 비로서 우리가 담담하게 죽을수 있을걸세. 그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보편적인 사상을 조금씩 조금씩 공부해 가면서 세태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미디어의 정보와 자신만만한 예술가들의 주장과 제멋에 취한 정치가들의 발언과 비평가들의 난해한 논증을 매일매일 분석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들의 제안과 호소와 이미지와 외양을 연구하는 것일세. 그래야만 결국 그자들 모두가 바보라는 놀라운 계시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러고 나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이지."...
크리톤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선생님께서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자네 벌써 죽을 때가 되어 가는구먼."
 
움베르토 에코,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중.

 
 

Wednesday, May 5, 2010

덕수궁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연속적인, 서울 덕수궁 석조전 그리고 준명당
서울 어느 곳이 이곳보다 깊고 풍부한 맛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